시청각 랩 (AVP lab)
AVP 2013~2019
avpavilion@gmail.com
시청각 랩(AVP lab)은 연구 공간이자 작품, 작가와 대화하는 창구로, 계간 시청각을 만드는 오피스 개념의 전시 공간이다.
AVP lab, where the exhibition is hosted, is an office-styled exhibition space that publishes AVP Monthly, in addition to serving as a research space and avenue to connect with artwork and artists.
서울 용산구 용문동 38-118 1층
(도로명) 효창원로 25길 9
1F, 38-118 Yongmun dong,
Yongsan-gu, Seoul
KAKAO MAP / NAVER MAP
시청각 랩 AVP LAB
전시 문서 Exhibition Document
계간 시청각 AVP Quart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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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1]를 기록하는 글

신지현
 


 
이 글은 «이곳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양윤화, 정이지 참여, 신지현 기획, 시청각 랩, 2022)에 대한 기록문서이다. 2022년 1월 16, 18, 19일 3일간 열린 이 이벤트는 공식적으로 아카이빙용 영상과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글로 현장을 기록하고, 글이 닿지 않는 부분은 미래 시점에서 기록문서를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기기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이유는 관습적으로 우리가 매체에 기대해온 바를 무화시키는 동시에 그림의 존재 방법, 그것을 보는/읽는 방향, 움직임에 그림이 개입하는 혹은 그림에 움직임이 덧대어 포개어지는 방식에 대한 실험인 기획 의도와 연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매체란 전시, 글, 그림, 움직임 등을 포함하기에 가능한 시도가 되겠다. 글의 시작에 앞서 이 전시/퍼포먼스가 단발의 사건이자 우연과 계획이 개입하는 짧은 구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벤트’라는 용어로 호명할 것임을 미리 일러둔다.
 
*
 
15평 남짓의 전시장은 비어있다. 예약한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은 용문동 주택가 언덕 위에 위치한 화이트 복합 벽돌로 마감된 다세대 빌라 1층의 전시장에 도착한다. 전시장 입구의 유리문을 기준으로 서서 실내를 들여다본다면 오른쪽으로는 창이 세 개 나 있고, 왼쪽으로는 길고 하얀 벽이 있는 공간이다.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지만, 정작 눈에 띄는 준비된 것은 없다. 이때의 관객이 마주할 당혹스러움, 고개를 내밀고 들어오길 망설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관람/경험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가장 긴 왼쪽 벽을 피해 창을 등지고 서서 시작을 기다린다. 그림을 기대하고 온 이라면 허공을 보게 될 것이고, 움직이는 무언가를 예상하고 온 이에게는 이미지가 보이는 공간일 것이기에, 여기는 그 어떤 기대로부터 어긋나는 세계이다. 늦은 5시 17분이라 고지한 이벤트 시간은 기상청에 등록된 2022년 1월 중순의 일몰 시각이다. 그렇게 이벤트는 실존하지 않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 그림이 없는 곳에서 움직임을 매개로 그림을 (다시) 보는 것, 해와 달이 교차하는 사이시간에 모인 이들에게 그림과 움직임이 하나로 포개지는 사이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시간을 제안한다. 
 
새소리와 함께 이벤트는 시작한다. 플레이어 Y가 전시장 가운데로 들어선다. 아침에의 클리셰인 맑은 새소리를 일몰 시각에 듣는 것은 이벤트의 제목«이곳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와 닮아 있다. «이곳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그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역설적인 문장으로, 사이공간 안에서 자연스러움과 이상함 사이의 존재들을 허여하는 언명이다. 소형 핸디캠 두 개를 손에 쥔 Y의 무빙이 시작된다. 서로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정도의 빛과 어둠이 섞인 공간 안에서 Y의 손짓을 따라 형(形)이 맺힌다. 단번에 알아볼 수 없는 붓질 혹은 색의 원형에 가까운 그것은 Y의 시선이다. J의 그림이 있던 자리에 다시 등장한 J의 그림이다. 플레이어의 등 뒤로 사람들이 모인다. Y의 발걸음에 관람객의 시선과 몸이 따라 움직인다. 쭈그려 앉아서 보는 이, 벽에 기대어 서서 보는 이,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이, 서성이는 이. 동세는 관람객 수만큼이나 복수형이다.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사운드는 무드를 전환시킨다. 별안간 등장하는 목소리. “꿈을 꿨습니다. 레이첼. 레이첼이 저를 피해 다니는 꿈이었습니다.[2] (…) 하지만 너무 피해 다니니 조금 약이 올랐고 레이첼을 물리적으로 막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레이첼 앞에 벽이 자라났습니다.” 목소리는 현실의 실천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림/자, 사운드, 빛과 움직임은 벽과 바닥, 천장을 구르고 미끄러지며 관객의 눈과 귀를 이끈다. 모든 게 이상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공간이다. “레이첼은 벽을 피해 계속 도망 다녔고 저는 계속 레이첼 앞에 벽을 세웠습니다. 지나가는 개미를 손으로 가두듯이. 그러다 꿈에서 깼습니다.” 공간에 부유하는 목소리는 누군가의 꿈과 꿈속 꿈의 경계를 오가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꿈을 읊는 것인지, 이곳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향해 말했어요. 절대 피하면 안 돼요. (…) 그때 문득 이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점점 선명해지는 그림들. 하품이 입김이 되어 사라지는 순간, 차가운 주스가 담긴 컵의 온도, 기지개 켜는 고양이의 몸동작, 이내 시들어 버리고 말 튤립. 그것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상태다. 움직임의 속성과 닮아있는 그것은 벽 그리고 창문을 일시적 지지체 삼아 달라붙어 있다가 이내 사라진 것들이다. 목소리에 맞추어 혹은 목소리와 관계없이 관객은 꽤 짙어진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Y를 따르고 빛의 움직임을 쫓는다. 공간 안에서 유일한 빛은 빔이고 이로 인해 드러나는 두 개의 시선은 어긋났다가 맞물리고 그림은 작아지고 늘어지며 도망치길 지속한다. 여럿의 관객이 비슷한 포인트에서 카메라를 꺼내 든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다가 플래쉬가 터진다. “새가 여전히 잘 날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런 대사를 읊는 영화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을 때 조금 놀라고 말았습니다. (…) 쉿.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돌멩이에 적어서 창밖에 던져버리세요.” 문득 그림을 비추던 빔 속에 Y의 손이 등장한다. 붓질에 따라붙는 그것은 그림 속 선을 모방하고 교란하는 시선의 다른 모습이다. 시퀀스를 갖기보다는 독립된 조각(piece/scene/asana)에 가까운 그것은 매끄럽고도 짓궂게 그림에 따라붙고 교차하고 또 이탈하며 서로를 향한다. 처음과 달리 사람들은 이제 꽤 플레이어 가까이에 서서 그의 손짓이 비추는 이미지를 바라본다. 빔이 관객의 몸에, 발끝에 투사되기도 한다. 빔 속 이미지가 창을 보여주면 몸을 돌려 실재의 창을 바라보는 이도 있고 멀찌감치 서서 그런 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각자 응시하는 대상이 다르다. “자다 말고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 그렇게 말하자 어디서 온 지 모르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커지는 음악 소리. 무빙이 끝나고 두 개의 빔이 꺼지자 그림과 움직임이 사라진 박명(薄明, twilight)의 공간으로 여광이 선명히 들어온다. 박수 소리가 들리고 전시장 문이 열린다. 관객들이 하나둘 빠져나간다.  
 
 
정이지
작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 낭만적인 분위기와 여운을 적확한 붓질로 그리려 노력하고 있다.
 
양윤화
작가. A와 B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 발생하는 오류에 관심이 있다. 이를테면, 당신과 나는 동시에 이 문장을 읽고 있다. 나도 지금 읽으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신지현
전시 기획자. 뉴미디어 시대 안에서 전통적 매체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연구과제로 삼고 전시와 글을 통해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
굵게 처리된 문장은 «이곳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서문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2]
색 처리된 문장은 양윤화 작가의 이벤트를 위한 스크립트 일부이자 본 이벤트에 등장한 ‘목소리’이다.